파인뉴스

긴 장마 때문에 금년 여름은 그렇게 무더운 줄 모르고 넘긴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여름은 여름 아니겠는가. 요즈음 한낮에는 섭씨 30도를 훌쩍 넘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새벽녘이면 자신도 모르게 홑이불 자락을 끌어당기는 쌀쌀함에서 벌써 가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초저녁이면 항상 찾아가는 동적골 산책길의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뛰쳐나오는 ‘여치’들을 보면서 가을은 이미 우리 문턱에 이르렀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며칠 후면 2학기 개강을 맞이하게 된다. 교직(敎職)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을 훨씬 빠르게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즉, 우선 1년이 1학기와 2학기 둘로 나뉘어지고 그 사이에 두개의 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1학기는 다시 6개월로 나뉘어지고, 1개월은 다시 4주의 수업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1년을 생활단위로 하는 다른 직업보다는 시간이 훨씬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금년 여름 장학은 꼬박 집과 연구실을 오가며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는 잘 다녀왔느냐”고 묻는 말에, 나는 “꼼짝 않고 지냈다”고 대답하곤 하였다. 우선 나이가 육십을 지나며 예전처럼 어디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편안한 게 좋은 것이다.

예전 한창 활동할 때를 생각해본다. 인도(印度)를 여행하고 돌아와 다음날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여행용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아내의 못마땅스러운 얼굴이 지금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는 그것이 행복했고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아침에 신문을 펼쳐드니 미국의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이 77세룰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미국정치에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정치적 거목이 사라진 것이다.

1849년 에드워드 케네디의 증조부인 패트릭 케네디가 기근을 견디지 못해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행 배에 오름으로써 시작된 케네디家 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정치명문가가 되었다. 패트릭 케네디의 외아들인 패트릭 조셉 케네디가 막노동과 술장사로 돈을 벌었고 형편이 어려운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돕는데 앞장선 것이 계기가 되어 매사추세추州의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케네디家는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케네디家를 정치적 명문가로 만든 것은 바로 이 패트릭 조셉 케네디의 아들인 조셉 케네디로서 그는 명문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후 은행장이 되었고 1914년 당시 동부의 중심도시였던 보스턴 시장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하여 4남 5녀를 낳았는데 둘째가 후일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이고, 셋째가 케네디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이며 막내가 이번에 세상을 뜬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다. 이쯤 되면 가히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명문가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느님은 공평한가 보다 이처럼 케네디家 에 영광을 내렸으면서도 그들에게 ‘케네디家의 저주’라고 불리 울 만큼 혹독한 시련을 함께 주었던 것이다. 1960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1963년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오즈왈드에게 저격당해 암살되었으며, 로버트 케네디는 196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도중 암살되었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두 형에 비해 재능에서 떨어진다는 평이 없지 않았지만 가문의 후광과 함께 1962년부터의 상원의원 경력을 바탕으로 대통령 꿈을 키웠던 에드워드 케네디 또한 1969년 파티에 참석했던 형 로버트의 여비서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강에 추락하여 여비서가 익사한 ‘차파퀴딕 스캔들’로 대통령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케네디는 대통령의 꿈이 사라진 후에도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서 반전(反戰)과 인권(人權) 그리고 복지(福祉)분야의 주요 법안을 제안․통과시키는 등 적지 않는 업적을 남김으로써 케네디家 의 명성을 유지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내가 중학생이던 때 사망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인줄도 모를 나이에 아버지의 관(棺)을 향해 거수경례로 마지막 인사를 보내던 존 F 케네디 2세 또한 1999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과는 달리 에드워드의 경우는 그의 아들 패트릭 케네디가 연방 하원의원으로 정치명문가의 맥을 잊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1990년 미국을 첫 방문했을 때 짬을 내어 버지니아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들러 케네디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이른바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불리 우는 불길이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 제창했던 ‘프론티어 정신’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이제 영면한 에드워드 또한 그의 형들인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와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힌다고 하니, 혹시 다시 그곳을 찾게 된다면 에드워드의 묘소에도 들리고 싶다.

존 F. 케네디의 묘소를 찾았던 때가 내 나이 불혹(不惑)을 갓 넘었을 때인데 나 역시 회갑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왕후장상(王侯將相)인들 어찌 세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오수열 <조대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