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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legend)은 운명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영웅이나 아름다운 인간의 죽음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때문에 전설은 미학적으로 숭고미와 함께 비극미를 지닌다. 영웅에 관한 전설은 그 영험한 힘에 감동한 민중에 회자됨으로써 그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한 인간에 관한 전설은 몇몇 사람의 가슴에만 기억된 비밀한 이야기로 떠돌다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후자의 전설은 더욱 참혹하게 아름답다. 전설은 무릇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스스로 증거물을 남긴다. 하연지에도 그러한 증거물이 있다.

하연지에 관한 전설은 대강 이러하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작은 연못가에 청동의 여인상이 있었다. 그 청동의 여인상은 늘 연못에 핀 연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노을빛 속에서는 연꽃처럼 피어오르려는 열정이 있었다. 작은 물고기가 어둠의 기슭으로 튀어오르며 하늘을 간질이는 저물녘이 되면 그 청동 여인상의 몸빛은 더욱 짙어져 어둠 속에 숨어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숙녀가 그 청동의 여인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깨끗한 얼굴을 하였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청동의 여인이 오래오래 내려다보는 그곳에 연꽃이 피고 있었다. 아, 하는 탄식소리와 함께 숙녀는 자신의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꿈을 그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날은 연못에서도, 청동의 여인에게서도, 그 숙녀의 가슴에서도 연꽃이 피어났다. 연꽃은 별이 연못에 퐁당 떨어져 피어난 꽃이었으므로, 알 수 없는 설렘과 그리움으로 미래를 소망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그 별빛이 돋아나게 마련이다.

숙녀는 마음이 맑고 고왔다. 풀꽃을 보면 풀꽃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고, 나뭇가지에 잠시 않아 있는 새와도 눈빛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며, 아저씨들이 깨끗이 쓸어놓은 도서관 가는 길에 햇살이 떨어지면 그 맑은 햇살들의 날줄과 씨줄에 대해 시를 썼다. 레슨을 받을 때는 마음이 떨려, 오르간 건반을 놓치고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지곤 하였다.

그 지역에 진한 화약 냄새가 지나갈 때, 청동의 여인상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여인의 녹색옷이 참혹한 슬픔에 젖어 검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한 참혹한 길을 걸어 깊은 슬픔으로 그 숙녀가 연못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노을빛이 지나갈 때에도 창백한 슬픔만이 물방울처럼 스며들었다.

이제 그녀의 그리움이나 소망은 맑고 투명한 색보다는 깊고 어두운 색으로 채색되었다.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그 어둡고 무거운 별빛은 세상의 모든 이슬을 모아도 닦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한 어두움을 간직한 채로 그녀는 선생님이 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연못가에서의 두 해가 청동의 여인상과의 만남이었고 헤어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녀린 소망에서부터 참혹한 슬픔까지 함께 나누었던 청동의 여인상에게 시를 지어바쳤다. 시에는 바람처럼 투명한 그리움과 청동 여인상의 갈비뼈까지 스며드는 아픔이 함께 있었다.

그 숙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어린이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녀의 맑고 순박한 품성을 어린이들이 따르게 되었다. 그녀의 생활은 다시 평화로웠다. 세상의 모든 이슬을 모아도 씻겨질 것 같지 않았던 답답한 가슴 속 어두운 빛이 어린이들의 눈빛으로 맑게 씻겨졌다.

그녀가 하늘의 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아이들의 눈에서도 별이 빛났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따라 모두 점등인의 별로 불려가 그 따뜻하고 맑은 불빛에 손을 비추었다. 그 순간 하연지에도 연꽃이 피어났다.

청동의 여인상은 연꽃 옆에서 돋아오르는 별빛을 보았고, 잠시 쉬러 물가로 나온 거북이와 같은 어린이들의 평화를 보았다. 비로소 여인상의 가슴을 가로지른 빗장 같은 아픔이 벗겨졌다. 이러한 신이한 일은 비밀한 전설처럼 이 하연지의 물에 스며들었다.

여선생이 된 그녀는 이제 성숙하여, 같은 학교에서 어린이 교향악단을 만들어 지휘하는 총각선생과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시를 쓰고 그이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시를 써서 새들의 노래를 불러들이면, 그이는 새들의 노래를 나뭇잎 위에서 춤추게 했다. 그러한 기쁨으로 아이들이 새처럼 즐겁게 노래하였다.

그녀의 기쁨은 섬세한 핏줄을 다치게 했고, 아름다움은 순간 순간 그녀를 설레게 하여 가슴을 다치게 만들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천사의 몫이었다. 하연지의 주인공인 그녀는 얼마 후 핏줄을 비우는 고통을 겪다가 천사가 되어 영원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갔다.

그러나 하연지에는 그녀의 숨결이 여전히 남아 있다. 자미수(紫薇樹) 아래 무지개가 뜨고 노을빛이 분수 위에서 부서지는 날,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순수한 그리움과 설렘을 간직한 사람만이 하연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 전설의 채록자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지켜본 사람이므로 한 자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썼음을 밝힌다.

이정재 <광주교육대학교 前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