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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돈을 시간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지만 돈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은 돈으로 사지 못한다. 한데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단 몇 분의 착오도 없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잠드는 시간이 밤 9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새벽 5시였다. 독신이었던 그는 가정부(家政婦)아닌 가정부(家政夫)의 시중을 받고 있었는데, 시간에 맞추어 깨우러 가면 “잠깐만 더 자게 해 달라”고 분부하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적어도 그 분부만은 거역해도 되는 분부였다. 만약 그 분부대로 했다가는 후에 꾸중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어나면 홍차 두 잔과 담배 한 대로 아침밥을 때우고 산책을 떠난다. 동네사람들은 산책중인 칸트를 만나면 바로 몇 시 몇 분이라는 것을 가늠했을 만큼 어느 시간에 정확히 어느 지점을 통과한다. 돌아와서 칸트는 그의 달력의 여백에 그날 산책에서 그 전날과 달라진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적어 넣는다. 어느 지점의 민들레 싹에 연두빛이 더해졌다든지, 포도덩굴의 감김새가 세 번에서 다섯 번으로 늘었다든지, 그리고 시장에 북해의 연어가 새로 들어왔다든지, 프랑스 접경의 칸타르치지가 첫선을 보였다든지….

아침밥은 간단하지만 저녁밥은 자신이 직접 요리, 5시간 동안이나 주져 앉아 즐기는 것이 또 칸트였다. 그의 요리는 그 시절 그 시기에 가장 맛있는 시식(時食)을 꼭 그때 한 번씩 골라 먹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낙이요. “그것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도가 3분의 1이나 묽어졌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다. 매일같이 미세하게 변하는 자연의 변화에 그토록 민감할 수 있었기에 시식락(時食樂)에 도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 시인 이상은이란 분은 인생 5대 낙 가운데 이 시식락을,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지은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은 인생 8대 낙 가운데 하나로 이 제철에 제 맛을 맛보는 시식락을 들고 있다.

비단 동서의 명사들 뿐 아니라 우리 옛 여염에서 시식을 찾아 먹은 것을 보면 칸트 정도의 식도락은 약과다. 각종 세시기에 보면 24절기마다 지방에 따라 특유한 시식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입춘(立春)에서 우수(雨水)철에는 녹기 시작하는 눈 위에 솟아나는 개자채(芥子菜)며 신감채(辛甘菜), 파순나물 경칩이 지나면 봄 미나리 살찐 맛이며…. 따라서 엄마의 맛손은 온도계 노릇도 한다. 국 맛이나 찌개 맛을 가장 맛있게 낼 수 있는 온도를 엄마는 새끼손가락을 담가보고 체감으로 분별한다. 그렇게 체온으로 온도를 맞춘 국을 먹는다는 것은 엄마의 체온을 고스란히 먹는 것이 된다.

또 간을 맞출 때 눈물 맛만큼만 짜게 할 때 가장 맛이 좋다 한다.

그래서 눈물 맛의 간에 체질화될 때까지는 일부러 슬픈 생각을 해서라도 눈물을 입속에 흘려 간을 보곤 했다 하니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눈물로까지 결속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엄마의 정은 소리없이 자녀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곧 맛손의 정의 도체다. 위해준다고 말하지도 않고 또 생색도 내질 않고 걷잡을 수 없이 손가락 끝을 통해 흘러드는 정과 사랑과 정성 때문에 그렇게 어머니가 좋을 수밖에 없다.

한데 현대가 잃고 사는 낙이 하나 둘이 아니다. 철철이 많던 시식의 상실도 현대인의 인생농도를 묽게하는 불행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온실재배 등으로 사시사철 나오는 것은 사시사철 먹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요즈음 초등학교 아이들 먹는 것을 조사한 것을 보니 소시지, 통조림 등 온통 슈퍼에서 손쉽게 사올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이 거으요, 컵라면을 먹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 제철 맛과 엄마의 정맛을 얼마나 증발시키고 살고 있는가.

3월 경칩을 맞고 보니 옛 시식이 절실하기만 하다.

고운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