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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다리(鐵橋)가 있다.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1930년 경전선 철로가 깔리면서 놓였다. 1970년대까지 횡갯다리(홍교), 소화다리(부용교)와 함께 벌교포구의 양쪽 기슭을 연결시켜 주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주었던 그 다리다. 소설에서 염상구는 깡패 왕초인 땅벌의 제의를 받아들여 희한한 결투를 벌인다.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배경이 벌교포구였다. 때는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부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가던 1953년까지다.

소설에서 염상구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하다. 잔인한 것 같으면서도 인정 많은 인물로 묘사됐다. 미워할 수 없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독자들의 인기도 가장 많이 받았다.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질 때도 서로 염상구 역을 맡으려고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꾸며놓은 드라마 세트장인 듯

<태백산맥>은 해방 직후 암울했던 시대, 민중의 고난사를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다. 소설에는 철다리 외에도 많은 곳이 배경으로 나왔다. 현부자네집은 소설을 전개해가는 중심무대였다. 소화다리(부용교)에서는 밀물 때 올라온 바닷물이 피바다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지개형의 돌다리인 ‘횡갯다리(홍교)’, 기품 있는 고택 ‘김범우의 집’도 있다. 중도방죽, 남도여관, 진트재, 소화의집, 회정리교회, 금융조합도 등장한다.

중도방죽은 일본인 지주 나카시마가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쌓았다. 하판석 영감도 등골이 휠 정도로 지게에 돌을 져 날랐다. 방죽 명칭에 일본인 지주의 이름(나카시마․中島)이 붙은 연유다. 지금은 산책로가 잘 단장돼 있다. 방죽은 꽃길와 갈대 가득한 갯골을 따라 철다리로 이어진다. 염상구가 담력을 과시했던 그 철교다.

철다리에서 도로를 따라 벌교역으로 간다. 벌교오일장 앞으로 좌판이 즐비하다. 여자만에서 건져올린 갯것에서부터 상추, 깻잎 등 남새까지 다 모여 있다. 벌교특산 꼬막도 빠지지 않았다. 벌교역은 염상구의 형 염상진의 목이 내걸렸던 곳이다. 염상구가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여?”라고 절규하며 형의 시신을 거뒀다.

길은 읍내 중심가로 접어든다. 벌교초등학교 정문 옆으로 남도여관이 자리하고 있다. 판자벽에 함석지붕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당시 보성여관으로, 토벌대의 숙소로 쓰였다. 지금은 말끔히 정비돼 카페와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염상진과 염상구, 김범우 등 소설 속 인물들의 인명판도 곳곳에 서 있다. 길거리도 부러 꾸며놓은 드라마 세트장 같다.

소설 속 지명과 공간 그대로

벌교의 본정통에 있는 금융조합과 자애병원을 거쳐 닿은 곳은 횡갯다리.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다. 빨치산이 주민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다리 중간에 쌀을 놔두고 심리전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뗏목다리를 건넜다. ‘벌교(筏橋)’란 지명이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다리를 건너 김범우의 집도 옛집 그대로다. 어른 키보다도 훨씬 더 높은 담장이 위압적이다. 당시 떵떵거리며 살았던 지주의 행태를 보는 것 같다.

소설 속에 나왔던 지명과 공간이 그대로여서 흥미진진하다. 소설의 대목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훑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소설 속을 여행하는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도 직접 만나는 것 같다.

소설의 문을 여는 첫 장면에 등장했던 현부자네 집은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다. 한옥 틀에다 일본식을 더한 겉모습이 색다르다.

현부자네 집 앞에 태백산맥문학관도 있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정하섭이 무당 소화를 만나기 위해 길을 가던 그 지점이다. 문학관에는 작가 조정래의 육필원고, 취재수첩, 만년필 등 소장품과 소설 속 이야기 등 모두 144건 623점이 전시돼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기념관이다.

벌교의 산과 들, 길과 건물에 하나같이 소설 속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소설 속의 주무대로 나왔던 여러 장소들이 소설과 똑같은 곳에 실존하고 있어 사실감을 더해준다. 작품의 구절을 떠올리며 그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가가 몸소 체험했던 식민과 분단시대의 아픔, 빈부 격차, 계급 갈등 등 우리 민족의 서글픈 근·현대사도 조명된다.

소설 <태백산맥>은 70여 년 전의 옛날 이야기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우리네 삶이기에….